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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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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NAHF.ku.d_0001_0040_0030_3550ID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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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丸都山城)

 
  • 구분유적
  • 시대고구려 초기~고구려 후기
  • 문서번호S000502
  • 위치(출토지)中國 吉林省 集安市 國內城址에서 通溝河를 따라 北으로 2.5㎞ 떨어진 높은 산에 위치. 地理座標는 宮殿址 北을 基準으로 N: 41° 09′ 02″, E: 126° 09′ 26.2″임. 山城이 位置한 山은 海拔 652m임.
  • 지역집안(集安市)
  • 유형성곽>산성
  • 형태사항전체 둘레 6,947m(6,951m ; 고구려문명기행, 조선고고학전서27).│동벽 1,716m, 서벽 2,440m, 남벽 1,786m, 북벽 1,009m. 146점 
 

출토지

 

중국 길림성 집안시 국내성지에서 통구하를 따라 북으로 2.5㎞ 떨어진 높은 산에 위치. 지리좌표는 궁전지 북쪽을 기준으로 N: 41°09'02", E: 126°09'26.2"임. 산성이 위치한 산은 해발 652m임.(中國 吉林省 集安市 國內城址에서 通溝河를 따라 北으로 2.5㎞ 떨어진 높은 산에 위치. 地理座標는 宮殿址 北을 基準으로 N: 41°09'02", E: 126°09'26.2"임. 山城이 位置한 山은 海拔 652m임)

 

구조특징

 

鳥居龍藏(1905년)의 조사내용은 산성은 후방은 높은 산을 이루고 있고 중간은 옴폭하게 들어가 있으며 후방 산의 능선이 전방으로 낮게 뻗어서 자연스럽게 성벽의 상태를 이룸. 산성의 입구는 트여 있으며 후방 산 능선에 돌로 성벽을 축조했음. 성 내부는 옴폭한 구릉을 이루고 있음. 성 내부에는 작은 개울이 있는데 산성 앞쪽의 통구하로 유입됨.
궁전은 성의 오른편 즉 동측에 조영되어 있는데 1905년 당시에도 석단을 축조한 흔적이 잘 남아 있었음. 석단 부근에는 기와나 기타 유물이 흩어져 있었다고 함. 성 내부에는 큰 저수지가 있음. 또한 성문에 접하여 돌로 축조한 높은 평대의 흔적도 남아 있음. 그리고 제1문을 지나면 또 문이 있고 그 다음에 또 문이 있어서 궁전지에 이를 때까지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던 것으로 파악했음. 산성 바깥에는 수백기의 고구려시기 고분이 분포해 있음.
關野貞(1913)의 조사내용을 살펴보면 산성은 산등성이가 드러나 있는 험준한 산봉우리로 포곡식 산성임. 지세가 험하고 산봉우리가 겹겹이 둘러져 있는 천혜의 성으로 산정에 인공적으로 견고한 성벽을 축조하여 실로 공격하기는 어렵고 지키기는 쉬운 요해처임.
성벽 둘레 약 1리, 성벽의 폭 약 3칸. 성가퀴의 높이와 두께 각 3척, 외벽 면의 전체 높이(성가퀴 포함) 약 11척 5촌(약 3m)임.
통구성벽(국내성)과 같음(성벽 아래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성돌을 조금씩 바깥으로 내어쌓아 안정되고 견고하게 축조함).
성문(남문)의 오른쪽에 축조 당시의 모습이 남아있음.
성내에는 원래 창고 등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이 있으며 붉은색의 와편이 산재해 있음. 대다수가 와당과 평기와의 파편으로 문양은 국내성지 및 동대자에서 나온 것과 같으며 고구려 말기의 것으로 보임. 또 성내에 고분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연못이 있음.
池內宏(1936)의 조사내용으로는 산돌, 강돌을 혼축한 석축 산성임.
산성은 서북부가 가장 높고 험준하며 바깥쪽 경사면은 가파른 낭떠러지이지만 안쪽은 완만한 경사지와 평지가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음. 서북 산기슭에서 발원한 개울이 경사지와 평지 사이를 흘러 남문에 이르러 성밖으로 빠져나가 통구하로 유입됨. 남문이 있는 남쪽이 가장 지세가 낮음.
산성의 둘레는 대략 2리 정도. 낭떠러지 높이 20~30척, 성벽 높이는 같지 않음[c지점(동벽 남단) 15~16척, a지점(남벽) 약 30척, b지점(남벽의 동단) 50~60척 정도, J지점(북벽) 17 척정도].
축조 방법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보존상태가 좋은 동남모서리 및 북벽의 남아있는 상태를 통해 성벽 안팎은 절석을 가지런하게 쌓고 내면은 낮게, 바깥면은 높게 쌓았으며 그 내부에는 강돌을 채웠음을 알 수 있음. 성벽의 높이는 같지 않음. 즉 C지점에서는 4척 1촌, C’지점에서는 11척 5촌, C’’지점에서는 14척 9촌. 북벽 J 지점에서는 17척에 달함. 성내에 민가가 8~9호 있어서 평지는 물론 경사지와 험준한 낭떠러지의 바깥면도 모두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음. 산성의 동·북 2벽을 보면 성벽은 부분적으로 축조되어 남벽처럼 연속적으로 축조되어 있는 것이 아님. 그러나 북벽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는 것에 반해, 동벽은 옛 모습이 남아있는 부분이 많음. 특히 동남 모서리와 북벽의 성벽은 거의 완전함.
李殿福(1982년)는 동벽 길이 1,716m, 서벽 길이 2,440m, 남벽 길이 1,786m, 북벽 길이 1,009m, 전체 둘레 6,951m로 조사함.
평면은 불규칙한 타원형임. 사면의 성벽은 서로 확연히 구별됨.
남쪽 성벽은 비교적 지세가 낮아 산성의 전체 형태는 키 모양임.
자연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여 축성하는 고구려 산성 건축의 특징을 체현하였음. 성의 동남 모서리는 높고 가파른 암벽을 성벽으로 삼고 있고 산정상부 평탄한 곳에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서 성벽을 쌓았음. 산등성이의 기복에 따라 성벽의 높낮이도 다르며 오목하게 들어간 곳은 성벽을 더 높이 쌓았음. 동벽의 남쪽, 서벽의 북쪽과 북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북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으며 북벽의 높이는 대체로 5m 이상임.
2004년 보고서의 조사내용은 평면이 불규칙한 장방형임.
성돌로 쌓은 석축성벽으로 동·북·서 3면의 성벽은 반원형처럼 생긴 산등성이를 따라 쌓았고 남벽은 통구하 변의 수직 절벽 위에 축조. 특히 동남 모서리는 가파른 낭떠러지와 수직절벽을 자연성벽으로 삼았는데 트인 곳에만 부분적으로 성벽을 쌓았음. 평탄한 산등성이에는 잘 다듬은 화강암 성돌로 성벽을 높이 쌓았음. 내외벽은 쐐기형 돌을 사용하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쌓아 가지런하게 겉쌓기를 하였음. 안채움부는 쐐기형 돌 안쪽에 길쭉한 돌을 끼워넣고 잔돌로 빈틈을 채워 견고하게 속쌓기를 하였음.
2001~2003년도 조사시에 산성 내부의 남쪽지역을 4개 구역으로 구획하고 각 구역별로 유적의 분포현황을 상세하게 파악했음. 산성 남부는 계곡을 경계로 동쪽 기슭과 서쪽 기슭 지대로 구획되는데 2002년 5월 유적의 분포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부 대지를 크게 4구역으로 구획함. 서쪽 기슭 전체를 Ⅰ구역으로 설정하고 동쪽 기슭은 자연 계곡을 경계로 다시 3구역으로 세분함. 남벽 부근 대지는 Ⅱ구역, 궁전지 주위는 Ⅲ구역, 장대와 “음마지” 부근은 Ⅳ구역으로 설정.
각 구역별 유적의 분포현황을 보면
Ⅰ구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6개 소구역으로 나뉨.
A구역은 유적이 없음.
B구역은 동단에 적석묘 10기 분포. 그 부근에 토기편과 초석 4개 산재.
C구역은 유적이 없음.
D구역은 유적이 없음.
E구역은 서부에서 적석묘 3기 발견되었으나 심하게 파괴되었음.
F구역은 서부에 3기의 적석묘가 보이는데 심하게 훼손되었음.
Ⅱ구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2개 소구역으로 세분.
A구역은 동단의 산기슭 아래에서 2기의 소형 적석묘 발견.
B구역은 중부 약간 남쪽에서 방단적석묘와 원형적석묘 1기씩 발견.
Ⅲ 구역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3개 소구역으로 세분.
A구역은 작은 계곡을 경계로 북에서 남으로 3개의 자연구역으로 나뉨.
A1에서 북단 소나무 숲에서 돌로 쌓은 작은 평대 발견.
A2에서 서쪽 끝의 대지상에서 토기편 6건 수습.
A3에서 동단에 대석괴 4개 분포. 그 부근에 적석묘 1기가 있음.
B 구역은 궁전지 소재. 동부 산비탈 아래에 소형적석묘 13기 분포. 궁전지 서남측에 봉토묘 2기와 적석묘 2기 분포. 봉토묘의 보존상태는 양호함.
C 구역은 유적이 없음.
Ⅳ 구역은 장대터 소재. 장대터 북쪽의 소나무 숲에 초석 18개 분포.
동벽 남단과 서벽 북단 및 북벽 서단의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음. 서벽 북단 및 북벽 서단의 잔고는 5m, 동벽 남단은 23단에 이름. 북벽과 서벽의 성벽은 최근에 보축한 흔적이 확인됨.
종래에는 성의 남벽이 대부분 잡초와 나무 넝쿨 속에 가려서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최근에는 비교적 성벽의 윤곽이 잘 드러나 보임.
최근의 보존상태는 성벽은 동벽의 남단과 북벽의 서단 구간의 보존상태가 여전히 가장 양호하며 남쪽 동문의 동남쪽에는 성가퀴와 성가퀴 안쪽의 기둥구멍도 원상태에 가깝게 잘 남아 있음. 특히 서쪽 북문 부근에는 외벽을 쐐기형 돌로 가지런하게 축조한 모습이 잘 남아 있는데 성벽을 쌓은 단수가 30여단에 이름. 그밖에 남쪽 동문과 북쪽 동문 사이에도 성벽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이 구간의 성벽은 크게 산능선의 바깥쪽에 내탁식으로 축조한 것과 평탄한 산능선 위에 협축식으로 축조한 것 두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음. 남쪽 구간에 전자가 많다면 북쪽 구간에는 후자가 많음. 북벽은 서쪽 북문 부근의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지만 동쪽 구간에도 산능선 바깥쪽을 따라 곳곳에 성벽이 남아 있음. 또한 북벽의 중간 구간은 비교적 험준하며 산능선에서 위쪽으로 높이 솟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많음. 이러한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활용하면서 절벽 사이의 트인 구간에만 성벽을 축조하기도 했음.
성문은 남문 2개, 동문 2개(또는 3개), 북문 2개, 서문 1개 등 총 7개(또는 8개)가 확인되었음. 정문에 해당하는 중앙 남문과 서쪽 남문, 서문 등은 최근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했음. 그렇지만 동벽이나 북벽의 성문은 방치되어 있어서 외관상으로는 성문인지도 명확히 알기 어려운 상황임. 다만 남쪽 동문의 좌우에는 평대의 흔적이 완연하며 과거 일본학자들이 북쪽 동문으로 추정한 지점 좌우에도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음. 이에 비해 북벽의 문지는 외관상으로는 흔적을 확인하기도 힘든 상태임.
성문과 옹성시설의 전체현황은 1905년에 산성을 처음으로 조사한 鳥居龍藏이 정문인 남문에 대해서만 언급했는데, 여러 문으로 이루어진 겹문으로 파악했음. 1913년에 산성을 조사한 關野貞도 남문에 대해서만 언급했음. 1936년 서벽을 제외한 성벽 전 구간을 조사한 지내굉은 남문 1개, 동문 3개, 북문(서쪽 북문) 1개로 파악했는데, 특히 남문과 남쪽의 동문은 옹성구조라고 파악함.
1982년 논문에서 이전복은 남문 1개, 동문 2개, 북문 2개로 파악했는데, 동쪽 북문을 새롭게 조사한 대신 池內宏이 성문으로 파악했던 동쪽 성문을 성문으로 인정하지 않았음. 이전복의 견해는 그 이후 중국학계에 계승되어 2001-2003년 조사시에도 동문은 2개인 것으로 파악하고, 종전에 池內宏이 동쪽 동문으로 파악했던 지점에는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함(동벽 E구간 Q5지점). 한편 2001년-2003년 조사에서는 남벽 서단과 서벽 남단에서 각각 성문을 새롭게 발견했는데, 특히 남벽 서단의 2호 문지는 옹성구조를 갖춘 것으로 확인됨.
상기와 같이 산성자산성의 성문 수는 조사의 진전과 더불어 계속 늘어나고 있음. 다만 1930년대에 산성을 조사한 池內宏은 동벽에 문지가 3개 있다고 보았지만, 중국학계에서는 2개라고 파악함. 더욱이 2001-2003년 조사에서는 池內宏이 문지로 보았던 동벽 북단의 트인 곳에 건물지가 있었다고 파악했음. 그런데 이곳은 동벽 북단에서 남쪽으로 300여m 떨어진 지점으로서 동벽이나 북벽의 다른 문지처럼 양측 산봉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지점으로서 성 안팎을 왕래할 수 있는 산길이 있음. 더욱이 이곳 좌우 성벽의 축조양상은 남쪽 동문의 평대와 유사하며, 주변에서는 기와편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함. 따라서 이곳에 건물이 있었다면 문루일 가능성이 높고, 움푹 들어간 곳으로 조망권이 넓지 않았다는 점에서 망루나 장대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파악됨. 이로 보아 동벽 북단의 트인 곳은 문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데, 추후 면밀한 조사를 통해 규명할 필요가 있음.
성 내부의 유적 가운데 2001~2003년에 궁전지, 장대, 저수지, 병사주둔지 등에 대한 조사를 마쳤음. 특히 궁전지와 장대는 원상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복원해 놓았음. 그렇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물이 많이 고여 있었던 저수지는 완전히 매몰되어 저수지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태이며 병사주둔지에 대한 상세한 조사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임.
그밖에 성의 북벽이나 동벽의 산봉우리이나 모서리에도 망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체적인 조사가 진행되지는 않았음. 특히 북벽 중앙 산봉우리 정상에는 암석에 홈을 판 흔적이 남아 있는데, 봉화대 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음.
또 池內宏에 따르면 장대 동남쪽의 저수지 이외에 점장대 동북 4·5 정 거리에 동벽과 연결된 경사면의 중턱에 상당히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전후 2단의 평지가 있는데, 아래 단 평지에 장대 동남쪽의 저수지와 같은 저수지가 있었다고 함. 李殿福은 성 안에는 2개의 샘물이 있는데, 하나는 성의 서북쪽 모서리에 있고, 다른 하나는 성의 동쪽 산기슭에 있다고 함. 두 샘물은 자연적으로 두 줄기의 작은 시내를 이루어 남옹성 부근에서 합쳐 통구하로 흘러 들어감.
출토유물에 대한 2004년 보고서 이전의 기술내용은 성내에는 원래 창고 등의 흔적으로 보이는 곳이 있으며 붉은색의 와편이 산재해있음. 대다수가 와당 및 평기와의 파편으로 수법문양은 통구 및 동대자에서 나온 것과 같으며 고구려 말기의 것으로 보임(關野貞, 1914).
1930년대 조사 시에 성문터, 병영터, 궁전터 등에 고구려 시기의 붉은색 기와편이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고 함. 그 당시 성 내부에 거주하는 현지주민으로부터 기와를 여러 개 구입하였는데 연화문와당, 귀면문와당 등이 있었다고 함(池內宏, 1938).
1964년 12월에는 산성 내부에서 철촉을 다수 채집하였음(集安縣文物志, 1984). 대부분이 마름모꼴임.
2004년 보고서의 기술내용 중 1호문지(JWN1) 출토 유물은 발굴 정리하는 과정 중에 문지 벽체 꼭대기 부분과 양측의 퇴적물 가운데서 일정 수량의 고구려 시기의 유물을 발견함. 출토된 대량의 건축 재료의 분석으로 볼 때 1호 문지는 목조 건축물에 해당됨. 1호 문지의 출토유물은 도질의 건축 재료를 포함해 철기 두 종류로 크게 양분됨.
2호문지(JWN2) 출토 유물은 2호문지를 발굴 정리할 때 문길, 양측 벽체 및 옹성의 제2층 퇴적 가운데서 대량의 잔파된 건축 재료들을 발견하였음. 그 중에 수면문과 연화문 와당 및 암키와, 수키와 잔편이 포함되며 또 일부 철기를 발견함. 옹성을 폐기한 뒤에 축조한 작은 옹성 가운데서 청대 화폐를 발견하였음.
3호 문지 출토유물은 3호 문지의 발굴 정리 과정 중 기와 잔편을 발견함. 암키와와 수키와 2종류로 모두 붉은색임.
장대에서는 비교적 다수의 건축용 기와가 출토되었음. 와당 및 각획문 기와 등 이 있음. 철제 못, 철제 화살촉, 도금한 동제 화살촉 등의 유물이 발견됨.

 

역사적 의미

 

주변의 유적 현황을 살펴보면 산성내 고분이 총 37기임. 대부분 서벽 안쪽의 산비탈에 분포. 고구려시기의 고분은 총 37기인데 대부분은 적석묘이고 봉토묘도 1기 있음. 적석묘는 무기단적석묘, 방단적석묘, 방단계단적석묘 등 세 종류가 있음. 봉토묘는 봉토석실묘로서 궁전터 서남쪽 30m 거리에 위치.
성 주변의 유적으로는 평지성과 건물터가 있음. 남쪽으로 통구하를 따라 2.5㎞ 정도 내려가면 통구하와 압록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의 동북쪽에 고구려 시기의 평지도성인 국내성지가 위치함. 국내성지 내부에서는 수많은 건물지가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그 주변에도 민주유적, 동대자 유적, 이수원자남 유적, 기상대 유적 등 다수의 건물지가 분포함.
고분과 능비는 우산 산기슭, 통구하와 마선구 연안, 칠성산, 하해방 등 압록강을 따라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게 펼쳐진 통구분지(집안분지)에는 고구려 시기의 적석묘와 봉토석실묘 등 1만 2천여기의 고분이 분포함. 특히 통구분지 동쪽의 태왕릉과 장군총 사이에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능비가 우뚝 솟아 있음.
보루 유적은 1906년 혼강 지류인 신개하를 거슬러 집안분지로 향하는 길목인 판차령에서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고 1963년에는 이곳에서 창·칼·화살촉 등 고구려 시기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음. 산성자산성의 전방 보루로 추정됨. 판차령에서는 소판차령을 거쳐 험준한 산능성을 따라 산성자산성의 서북모서리로 나아갈 수 있음. 또한 산성의 동북쪽 3㎞ 거리에 위치한 협피구문 양안의 절벽 위에서 보루가 발견되었는데 협곡 사이로 통구하가 산성 쪽으로 급류하고 있음. 이러한 보루 유적은 산상자산성 자체의 방어체계와 연관될 것으로 추정됨.
압록강 우안을 따라 형성된 통구분지(집안분지)서북쪽의 험준한 산에 위치함. 통구분지는 동서 길이 10㎞, 남북 폭 2~4㎞로서 압록강 중류유역에서 가장 넓은 분지임. 통구하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통구분지 서쪽에는 평지성인 국내성지가 있음.
통구분지의 북쪽으로는 노차령산맥에서 뻗어나온 우산이 압록강과 나란히 달리며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동쪽의 용산과 서쪽의 칠성산과 함께 통구분지 전체를 방어해주는 천연 병풍의 역할을 하고 있음.
산성은 통구분지를 감싸고 있는 우산의 서북쪽, 칠성산의 동북쪽에 위치함. 통구하를 따라 동남쪽으로 2.5㎞ 내려가면 평지성인 국내성지에 도달할 수 있음. 이로 보아 산성은 평지성인 국내성지와 밀접히 연관될 것으로 추정됨.
산성자산성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1905년이며 그 뒤 1913년 조사에서 산성의 전체 평면도와 더불어 개략적인 성벽단면도가 작성되고 1936년 조사에서는 남벽, 동벽, 북벽의 축조양상을 확인함과 더불어 비교적 상세한 성벽단면도를 작성했음. 1949년 이후 중국학자들이 여러 차례 성벽의 전체현황을 재조사하고 2001-2003년에는 각 성벽을 구간별로 세분하여 축조양상과 보존상태를 상세히 조사하고 성벽의 단면도와 정면도 등 많은 실측도를 작성했음. 전체 성벽 가운데 동벽의 남쪽 구간, 북벽의 서쪽 구간, 서벽의 북쪽 구간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음. 이러한 양상은 2010년 10월의 현지답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음. 동벽 남쪽과 북벽 서쪽 구간에서는 성돌을 20~30여단 전후씩 가지런하게 쌓은 성벽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음. 성벽의 전체적인 축조양상은 환인 오녀산성이나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등과 비슷함. 특히 자연암반을 성벽기초부로 활용하는 양상이나 수직절벽이나 산등성이의 높이 솟은 암석을 천연성벽으로 활용하는 양상 등은 고구려 초기 산성의 대표적인 축성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음. 이러한 성벽 현황으로 보아 산성자산성의 초축은 고구려 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음.
1913년 성벽 윗면에서 성가퀴와 기둥구멍이 확인된 이래 1936년과 1980년대에도 동벽 남쪽 구간, 북벽과 서벽에서 성가퀴와 더불어 기둥구멍이 다수 확인되었음. 특히 1949년 이후의 재조사에서는 동벽 남쪽 구간에서 약 20개의 기둥구멍을 확인했다고 함. 2001~2003년에는 동벽, 북벽, 서벽에 남아있는 성가퀴와 기둥구멍의 현황을 각 구간별로 상세히 조사했음. 특히 동벽 E구간의 Q6 지점에서 외벽을 5단으로 축조한 성가퀴의 원모습을 확인했으며 기둥구멍은 동벽에서 8개, 북벽에서 1개, 서벽에서 2개 등을 조사했음. 성가퀴 안쪽에 설치한 기둥구멍의 기능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한 상황이지만 환인 오녀산성과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등 압록강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 초기 산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에는 거의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음.
성문 현황의 경우 1905년과 1913년 조사에서는 중앙 남문만 확인되었지만 1936년 조사에서는 중앙 남문과 더불어 동문 3개, 북문 1개 등을 확인했음. 특히 중앙 남문과 남쪽 동문의 옹성구조가 밝혀짐. 그렇지만 1949년 이후의 재조사에서는 동쪽 북문을 추가로 확인했지만 북쪽 동문은 문지로 인정하지 않음. 이러한 견해는 2001~2003년 조사에도 계승되어 동문이 2개인 것으로 파악함. 다만 2001~2003년 조사에서는 중앙 남문을 발굴하는 한편 서쪽 남문과 서문을 새롭게 발견했음. 특히 서쪽 남문에서는 옹성구조와 더불어 청말에 산성을 재사용한 흔적을 확인했음. 따라서 북쪽 동문을 문지로 인정한다면 산성자산성에는 남문 2개, 동문 3개, 북문 2개, 서문 1개 등 총 8개의 성문이 설치되었고 이 중 중앙과 서쪽의 남문, 남쪽의 동문은 옹성구조를 갖추었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음. 이러한 문지 부근에는 기와와 와당편을 비롯한 많은 건축재료, 철기류 등이 출토되고 있는데 3세기 이전으로 올려볼 수 있는 유물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음. 다만 서쪽 남문의 문길에서는 불탄 건축자재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 성문이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함.
20세기 전반부터 장대와 저수지를 비롯하여 산성 내부의 건물지가 다수 확인되었음. 다만 2000년 이전에는 이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외형적인 현상만 지적되었음. 2001~2003년에 중앙 남문 뒤쪽의 장대, 장대 동남쪽의 저수지, 궁전지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음. 그 결과 장대, 저수지, 궁전지 등의 규모와 축조양상 등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기와와 와당을 비롯한 수많은 건축자재, 철기와 토기, 동기 등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음. 이 가운데 궁전지에서 ‘小兄’이라는 관등명이 새겨진 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음. 이는 궁전지의 조영에 고구려의 중하위 관등인 소형을 소지한 관인이나 장인이 대거 관여했음을 반영함. 최근 대다수 중국학자들은 궁전지를 비롯한 산성 내부의 건축물이 고구려 초기에 조성되어 342년 환도성 함락과 더불어 소실되었고 이때 산성도 폐기되었다고 파악하고 있지만 일찍이 關野貞이 지적한 것처럼 궁전지 등에서 출토된 와당은 동대자 유적의 출토품과 유사하며 대체로 5세기 후반 이후로 편년됨. 따라서 문헌기록만을 근거로 산성 내부의 성곽시설이나 건물지의 연대를 342년 이전으로 비정하기는 힘들다고 생각됨. 성곽시설이나 건물지의 구체적인 연대는 향후 정밀한 발굴조사와 더불어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이상과 같이 성벽의 축조양상이나 성벽에 남아 있는 성가퀴나 기둥구멍의 현황만 놓고 본다면 산성자산성은 환인 오녀산성과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등과 함께 3세기 이전에 축조된 고구려 초기 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음. 그렇지만 현재까지 성문 주변을 비롯하여 장대지, 궁전지, 저수지 등에서 기와와 와당편을 비롯한 건축자재, 철기, 토기, 동기 등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지만 3세기 이전으로 편년할 만한 유물은 거의 확인되지 않은 상태임. 오히려 장대나 궁전지에서 출토된 와당은 5세기 후반 이후의 고구려 후기로 편년될 가능성이 높다고 함. 따라서 산성자산성의 초축시기나 사용기간에 대해서는 향후 정밀한 발굴조사와 다른 성곽이나 유물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국내 천도와 관련된 사료에 따르면 현재 산성자산성이 위치한 통구분지(집안분지)일대가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이었다는 데는 거의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음. 다만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한 시기 국내 천도 이후의 초기 중심지, 산성자산성의 축성시기 등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분분한 실정임. 먼저 국내 천도와 관련된 사료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음. 이에 따르면 고구려는 유리왕 22년 국내로 천도하면서 위나암성을 축조하였고 그 이후에도 국내성만 도성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환도성, 평양성 등으로 이도(이거)하였다고 함. 이에 종래 국내성, 위나암성, 환도성의 관계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고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이 제기되었음.
서기 3년(유리왕 22) 10월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 축조.
198년(산상왕 2) 2월 환도성 축조.
209년(산상왕 13년) 10월 환도로 이도.
246년(동천왕 20) 10월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 파괴.
247년(동천왕 21) 2월 환도성의 파괴로 인해 수도로 복구 불가능.
평양성을 축조하여 백성과 종묘, 사직을 옮김.
336년(고국원왕 4) 8월 평양성 증축.
342년(고국원왕 12) 2월 환도성 수리, 국내성 축조.
342년(고국원왕 12) 8월 환도성으로 이거.
342년(고국원왕 12) 11월 전연 모용황의 침입으로 환도성 파괴.
343년(고국원왕 13) 7월 평양동황성으로 이거.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
20세기 이전 국내성(환도성)의 위치 비정은 고려나 조선시기에는 대체로 국내성과 환도성은 동일한 곳에 위치한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그 위치는 압록강 하구 근처(《高麗史》兵志)를 비롯하여 의주(《三國史略》)나 의주 남쪽의 인주(《東國輿地勝覽》권52), 초산부 강북의 올자산성 곧 환인 오녀산성(《東史綱目》), 만포진 맞은 편(《海東繹史》), 초산 대안(《大韓疆域考》권3) 등으로 추정되었음. 19세기 후반 통구분지에서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된 이후 국내성과 환도성은 대체로 통구분지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되었지만(白鳥庫吉), 국내성지를 비롯하여 산성자산성과 주변의 유적에 대한 조사가 진전됨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음.
국내성과 환도성의 관계에 대한 여러 견해 분 먼저 1905년 산성자산성을 처음 조사한 鳥居龍藏은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된 판석령과 산성자산성이 서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산성자산성을 관구검이 함락시켰다는 환도성에 비정하고 집안 국내성지는 환도성의 별성으로 파악함. 그리고는 환인 오녀산성의 본래 명칭인 올자산성의 발음이 유리왕 22년에 천도했다는 국내 위나암성의 ‘위나’와 유사한 사실을 근거로 국내성은 환인 오녀산성으로 비정함. 또한 이 무렵 松井等도 환도성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된 판석령으로 비정한 다음 국내성은 임강현으로 비정했음. 이로써 국내성과 환도성을 다른 곳에 비정하는 이처설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는데 유수림 일대에서 대규모 고분군을 조사한 關野貞은 국내성을 국내성지, 위나암성을 산성자산성으로 비정하면서 환도성은 유수림 일대로 비정했음. 그 뒤 중국학계의 王健群은 국내성=영흥(불내성), 환도성=집안현성, 북한의 손영종이 국내성=집안분지, 환도성=신빈 흑구산성으로 비정하는 등 이처설이 지속되고 있음. 그렇지만 1906년 동천왕대에 환도성을 함락했다는 관구검의 기공비가 집안 소판차령에서 발견된 사실에 유의한 대다수 학자들은 국내성과 환도성을 모두 통구분지 일대로 비정하고 있음. 다만 현재 한국학계나 중국학계의 대다수 학자들이 국내성은 평지성인 국내성지, 환도성은 산성인 산성자산성 등으로 분리하여 비정하는데 비해 일본학자들은 국내성·환도성을 같은 도성에 대한 두 개의 칭호 또는 ‘환도’는 국내성에 대한 중국 측 가칭으로서 모두 국내성지(집안현성)에 해당하며 산성자산성은 그 부속 산성이라고(三品彰英)파악하기도 함. 이러한 일본학자들의 견해는 국내성·환도성을 같은 성곽을 지칭한다고 파악하는 점에서 동일설로 명명할 수 있음.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시기를 산상왕대로 파악하는 견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
국내천도 시기와 위나암성, 환도성의 관계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유리왕 22년(A.D. 3)에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축조했음. 공손씨의 압박을 받던 산상왕 2년(198년)에 환도성을 축조한 다음 동왕 13년(209년)에는 환도성으로 이도했다고 함. 반면 《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공손씨의 침공으로 도성이 파괴되자 산상왕이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고 함. 국내학계나 중국학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근거로 국내로의 천도시기를 유리왕대로 설정하고 위나암성과 환도성을 모두 산성자산성에 비정하고 있음. 이에 비해 일본학자들은 白鳥庫吉과 池內宏 이래 《삼국지》동이전의 기록을 근거로 산상왕대인 2세기 말경에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했다고 파악하고 산상왕 이전의 고구려 왕계나 사료까지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며 불신했음. 이에 따른다면 산성자산성의 축조연대는 산상왕대 이전으로 설정할 수 없음. 국내 위나암성을 환인 오녀산성으로 비정하고 환도성을 집안 산성자산성으로 비정한 鳥居龍藏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음. 최근 국내나 구미학계에서도 위나암성을 환인 오녀산성으로 비정하고 유리왕 22년 국내천도 기사를 졸본지역 내에서의 천도로 파악했음(노태돈, Mark Byington). 그런데 고구려는 첫 번째 도성인 졸본에서 이미 평지거점과 군사방어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계를 구축했음. 산상왕이 축조한 성곽은 국내 도성 전체가 아니라 군사방어성인 환도성을 가리킴. 따라서 산상왕의 도성 건설은 공손씨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지역의 평상시 거점에서 새로운 군사방어성으로 거처를 옮긴 것을 가리키며 그 이후 공손씨를 이어 조위의 침공위협이 계속되었으므로 군사방어성을 계속 임시 왕성으로 삼은 것으로 파악됨. 실제 동천왕대에 고구려를 침공한 관구검은 비류수(혼강 유역)을 경유해 정현(혁현, 정현)을 넘은 다음 ‘현거속마하여 비로소 환도성에 오른 다음 그 도읍을 도륙했다’고 하는데 이는 환도성이 험준한 산에 위치한 산성임을 시사함. 따라서 산상왕대에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는《삼국지》동이전의 기사는 통구분지 내의 평지성에서 방어용산성으로 이거한 사실을 기술한 것으로 산상왕대 천도설은 성립하기 어려움. 즉 문헌자료상 산성자산성의 초축 연대는 적어도 산상왕이 환도성을 축조했다는 198년으로 설정할 수 있음. 그럼 산성자산성이 산상왕대 이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내 위나암성과 환도성의 관계임. 현재 국내학계나 중국학자들은 대부분 유리왕 22년에 국내로 천도하면서 현재의 산성자산성에 위나암성을 축조하고 그 뒤 산상왕대에 위나암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다음 그 명칭을 환도성으로 변경했다고 파악하고 있음. 이에 따른다면 산성자산성의 초축연대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소급할 수 있음. 그렇지만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는 윤색된 부분이 많으므로 유리왕대 천도설을 그대로 신빙하기는 어려움. 제반 상황을 종합하면 졸본에서 국내로의 천도는 국가체제를 확립하던 1세기 중후반에 단행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국내지역이 제2현도군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군사방어상 유리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음. 이와 더불어 국내지역이 당시 고구려가 배후기지를 건설하려던 동해안 방면과 가깝고 압록강 중상류 전체를 아우르는 수로망의 중심지라는 점도 고려되었다고 생각됨. 다만 태조왕대에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했다고 하여 위나암성의 위치를 곧바로 현재의 산성자산성으로 비정하기는 힘듦. 위나암성에 대한 기록은 대무신왕대 이후 나오지 않으며 환도성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도 없이 때문임. 위나암성과 환도성의 관계와 나아가 산성자산성의 초축연대 등에 대해서는 향후 더욱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됨.
상기 검토를 통해 산성자산성의 초축 연대나 위나암성과의 관계를 명확히 알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산성자산성이 공손씨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2세기 말에 축조한 환도성에 비정됨을 확인할 수 있었음. 즉 산성자산성은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인 국내지역 평지도성의 방어용산성으로 축조되었던 것임. 다만 공손씨 세력이 괴멸된 다음에도 조위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산성자산성=환도성을 계속 임시 왕성으로 삼았음. 마침내 246년 조위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함락되었음. 산성자산성이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반까지 약 50여년간 임시 왕성으로 사용되었던 것임. 그 뒤 산성자산성은 방치되었다가 4세기 전반 전연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 342년 2월 개축하여 8월에 임시 왕성으로 삼았지만 같은 해 11월에 전연 모용황에게 함락되어 파괴됨. 중국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때 산성자산성이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파악하고 성곽 시설이나 건물지의 연대를 4세기 중반 이전으로 설정하고 있음. 그렇지만 장대나 궁전지 등에서 출토된 와당은 5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 후기로 편년됨. 더욱이 본래 산성자산성을 지칭하던 ‘환도’가 427년 평양 천도 이후에도 ‘국내성’과 더불어 구도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음. 따라서 산성자산성은 평양천도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평양천도 이후 산성자산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별다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향후 다각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음.

 

자연환경

 

백두산에서 압록강 우안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어내린 노령산맥의 첩첩 산봉우리 사이에 위치함. 산성자산성이 위치한 산은 해발 652m(676m; 李殿福(1982-6), 집안현문물지)로서 속칭 환도산으로 불림.
산성의 동쪽 0.5㎞ 거리에 산성자촌이 있음. 집안 평야에서 북쪽으로 가는 두 갈래 길을 지키고 있어 집안의 관문같은 위치에 있음.
산성 주변에는 여러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솟아있어 매우 험준한 지세를 이룸. 대체로 산성 서북쪽의 지세가 높고 험준함.
산성의 동쪽에는 비교적 넓은 골짜기가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에는 우산이 있음. 산성의 서쪽은 깊은 골짜기로서 소판차령과 마주하고 있으며 산성의 서남쪽은 칠성산으로 이어지는데 남북방향으로 압록강변까지 뻗어있어 오른쪽 방어벽 구실을 함.
동․북․서 삼면의 바깥쪽 경사면은 깎아지는 듯한 자연절벽이나 가파른 산비탈이지만 안쪽에는 완만한 경사지와 평지가 비교적 넓게 펼쳐져 있음. 가장 낮은 남쪽도 수직절벽으로 압록강 지류인 통구하에 잇닿아 있어 일종의 해자 역할을 하는 요새지임.
산성의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의 고도차는 440m로서 전체적으로 키모양을 이룸. 이 가운데 산성의 북부는 지세가 비교적 높으며 산봉우리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해발은 349-652m임. 장가구(동쪽)와 조가구(서쪽)라 불리는 골짜기 두 개가 남북방향으로 달리다가 산성 남부의 계곡에서 만남. 장가구의 북단은 다시 흑할자구(좌측)와 대요하자구(우측)라 불리는 두 개의 골짜기로 갈라지는데 흑할자구는 북벽 중단으로 이어지고 대요하자구는 성벽 동북 모서리로 이어짐. 조가구는 경사가 조금 완만한 편으로 북단에서 다시 두 개의 골짜기로 갈라지는데, 좌측의 와자구는 서벽으로 이어지고 우측의 반도구는 성벽 서남 모서리로 이어짐. 장가구(동쪽)와 조가구(서쪽)는 비록 경사가 가파르지만 성 내부의 통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됨.
산성의 남부에는 경사가 완만한 평탄지와 산비탈이 많이 형성되어 있음. 대체로 해발 310m 이하로서 현재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고 밭 곳곳에 원두막이 있음. 성내에는 민가도 한 채 있음. 서북 모서리와 동쪽 산기슭에서 발원하는 작은 개울이 경사지와 평지 사이를 흘러 남문 부근에서 합류하여 통구하로 유입됨.
산성의 남부는 계곡을 경계로 크게 동쪽 기슭과 서쪽 기슭 지대로 구획됨. 2002년 5월 조사시 편의상 유적의 분포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남부 대지를 크게 4구역으로 구획함. 서쪽 기슭 전체를 Ⅰ구역으로 설정함. 동쪽 기슭은 자연 계곡을 계곡을 경계로 크게 3구역으로 구획하였는데 남벽 부근 대지는 Ⅱ구역, 궁전지 주위는 Ⅲ구역, 장대(요망대, 전망대) 및 “음마지” 부근은 Ⅳ구역으로 설정함. 이 가운데 Ⅰ구역과 Ⅱ구역에는 적석묘가 여러 기 분포함. Ⅲ 구역에는 궁전지와 적석묘, 봉토묘 등이 분포함. Ⅳ구역에는 장대와 병사주둔지 등이 분포함.
산성의 남쪽 수직절벽 아래로는 통구하가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국내성지 서남쪽에서 압록강으로 유입됨. 통구하 연안을 따라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고 고구려 시기의 고분이 무수히 분포되어 있음.

 

유물정보

 

鐵器 342점, 靑銅器 1점, 土器 3점, 瓦類 14518점, 瓦當 111점, 骨 13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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