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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성

백암성(白巖城)

등탑시(燈塔市) 동남의 서대요향(西大窰鄕) 성문구촌(城門溝村)의 북쪽 거대한 암반 위에 자리잡고 있다. 동북쪽이 높고 서남의 마을 쪽으로 내려오면서 낮아지는 지형으로, 남쪽은 태자하(太子河)에 면한 절벽이다. 백암성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삼국사기』에 547년 개축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암성은 이보다 앞서 요동(遼東) 전역을 확보한 고구려가 요동성(遼東城)을 서방전선의 중추로 삼게 되면서 그 배후의 거점으로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성벽은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불규칙한 네모꼴의 평면 구조를 보인다. 전체 둘레는 대략 2km정도이다. 안팎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석벽이 동·서벽과 북벽 구간에 잘 남아 있다. 다만 군데군데 보이는 회 접착 부분은 고구려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의 보수 흔적이다. 남쪽 구간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북벽과 동벽에서는 부분적으로 성가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가장 높은 동남쪽, 후대의 봉화대에 서면 성 안은 물론 주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견고한 성벽과 함께 백암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치이다. 5곳의 치가 알려져 있고 이 가운데 3곳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서북벽에 약 70m 간격으로 시설되어 있다. 육중한 성벽의 하중을 견디기 위한 치의 원각방형(圓角方形) 기단부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치와 치 사이의 중간 지점에는 성벽 안쪽으로 석대를 3곳 쌓아 올렸다.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을 시설하는 한편, 성벽을 견고하게 떠받치는 기능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은 서남 모퉁이, 평지까지 내려온 곳에 있었으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다만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문비석이 가옥의 벽체로 쓰이고 있어 대강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쪽으로 성벽이 터진 곳은 서문의 흔적인지 불분명하다. 한편 성 안에는 성돌로 이용된 채석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벽의 위용과는 달리, 645년 고당전쟁기간 중 백암성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요동성의 함락에 겁을 먹은 성주가 당군에 내응하였고, 이로 인해 오골성(烏骨城) 등에서 달려왔던 구원병을 포함 1만여 명의 남녀가 포로가 되는 비극이 벌어졌었다. 중국 현지의 명칭인 연주성(燕州城)은 당시 백암성을 점령한 당군이 일시적으로 두었던 ‘암주’에서 연유하였다. 고구려성의 명칭으로는 걸맞지 않은 것이다.
백암성 전경(동남→서북)
백암성 단면도
성벽 축조방식(서북벽)
서북벽의 전경
3번째 치
치 하단부에 보이는 굽도리 축조방식
백암성 서남쪽의 모습. 왼쪽으로 보이는 물줄기가 태자하이다
서북벽
성돌의 현재 쓰임새
성가퀴
백암성 표지판
남쪽에서 바라본 성
태자하에서 바라본 성
동남쪽 구간
북벽
봉화대 쪽으로 이어지는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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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성(白巖城) 자료번호 : iskc.d_0005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