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세력과 동아시아의 개항
5-1단원 1차시
Ⅴ. 국민 국가의 수립
개항과 근대 국민국가 수립
제국주의 침략과 피해
민족 운동
평화를 지향한 노력과 국제 연대
서구 문물 수용과 사회변화
개항과 근대 국민국가 수립
서양 세력과 동아시아의 개항
근대적 개혁의 추진
국민국가 수립 노력
1. 서양 세력과 동아시아의 개항
서양 세력의 등장과 동아시아
청의 개항
일본의 개항
조선의 개항
1.서양 세력의 등장과 동아시아의 개항
1. 서양 세력의 등장과 동아시아
- 19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세
- 청 - 강력한 황제권 중심의 지배체제 유지
- 일본 - 에도 막부 지배 아래 평화 지속
- 조선 - 영·정조 시대 거치며 국가 기반 재정비, 세도 정치로 정치 기강 문란
- 19세기 중반 동아시아
- 서양 세력의 등장 → 국제정세의 동요 → 서양 세력의 경제적·군사적 도전 직면 → 서양에 문호 개방 → 서양 주도의 국제질서에 편입
1. 서양 세력과 동아시아의 개항
2. 청의 개항
- 배경
- 청의 제한 무역으로 인한 영국의 무역 적자 발생 → 영국이 무역 적자 만회 위해 아편 밀수출 → 청의 국민 건강 악화 및 은의 유출 심각 → 청의 아편 금지 정책 시행 → 영국의 전쟁 도발(제1차 아편전쟁,1840) → 영국 승리 → 난징조약(1842) 체결
- 결과 : 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동요
<참고 : 아틀라스 중국사,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출처 :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출처 :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아편 전쟁
아편 전쟁은 동아시아 지역 질서 운영의 원리를 조공체제에서 조약체제로 변화시킨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조공체제는 상·하국 간의 의례를 기반으로 극히 제한된 무역만을 전제하는 데 비해, 조약체제는 국제법상 대등한 국가 간의 조약에 의거해 성립되고 자유무역을 전제한다. 청은 자유무역 및 조약체제를 원했던 근대화된 영국해군의 함포공격에 연전연패하다가 결국 1842년 난징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는 전통적인 조공체제에서 조약체제로 대체되었다.
<참고 : 아틀라스 중국사,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난징 조약
청조는 영국과 1842년 난징 조약을 맺고 이듬해 부속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른바 자유무역에 관한 조항으로, 5개 항구를 개방하고 청조의 공행 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서구열강에게 종속시키는 불평등 조항으로, 협정관세, 영사재판권 및 최혜국대우 등을 인정하고 홍콩을 떼어준 것이다. 아편무역에 관한 조항은 없었으니 기존의 은밀한 거래는 그대로 묵인된 셈이다. 그러니까 조약상으로 보면, 영국은 아편도 팔고 공산품도 파는 ‘꿩 먹고 알 먹는’ 자유무역을 얻어낸 것이다. 청조는 아편을 막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으니 다른 것을 내주는 대신 아편만이라도 막았어야 했지만 결국 꿩도 알도 다 내준 꼴이 되었다. 그 후 각국과 맺은 조약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아편 전쟁은 동아시아 지역 질서 운영의 원리를 조공체제에서 조약체제로 변화시킨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조공체제는 상·하국 간의 의례를 기반으로 극히 제한된 무역만을 전제하는 데 비해, 조약체제는 국제법상 대등한 국가 간의 조약에 의거해 성립되고 자유무역을 전제한다. 청은 자유무역 및 조약체제를 원했던 근대화된 영국해군의 함포공격에 연전연패하다가 결국 1842년 난징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아시아 세계의 질서는 전통적인 조공체제에서 조약체제로 대체되었다.
<참고 : 아틀라스 중국사,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난징 조약
청조는 영국과 1842년 난징 조약을 맺고 이듬해 부속조약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른바 자유무역에 관한 조항으로, 5개 항구를 개방하고 청조의 공행 제도를 폐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서구열강에게 종속시키는 불평등 조항으로, 협정관세, 영사재판권 및 최혜국대우 등을 인정하고 홍콩을 떼어준 것이다. 아편무역에 관한 조항은 없었으니 기존의 은밀한 거래는 그대로 묵인된 셈이다. 그러니까 조약상으로 보면, 영국은 아편도 팔고 공산품도 파는 ‘꿩 먹고 알 먹는’ 자유무역을 얻어낸 것이다. 청조는 아편을 막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으니 다른 것을 내주는 대신 아편만이라도 막았어야 했지만 결국 꿩도 알도 다 내준 꼴이 되었다. 그 후 각국과 맺은 조약도 마찬가지였다.
<출처 :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1. 서양 세력과 동아시아의 개항
3. 일본의 개항
- 배경
- 청의 아편전쟁 패배 및 서양 세력에 대한 정보 입수 → 쇄국 정책 완화, 국방 대책 강구
- 미국 페리 함대의 일본 접근 → 미국의 무력시위에 굴복 → 미·일화친 조약(1854) 및 미·일수호통상 조약(1858) 체결
- 결과
- 서양과의 통교 본격화
- 막부 타도 운동으로 연결
<출처 : 일본인의 선택>
페리 함대
1853년 6월 3일, 요코하마 근처의 우라가 앞바다에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동인도함대가 나타났다. 페리가 이끈 4척의 군함 중 2척은 2400톤이 넘는 증기선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최신예 군함이었는데, 이러한 군함의 위세에 눌려 에도 막부는 페리가 가지고 온 미국의 국서를 접수하였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미·일화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출처 : 일본인의 선택>
미·일화친 조약 및 미·일수호통상 조약
일본이 맺은 미·일화친 조약은 최혜국 대우조항이 삽입된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이 조약을 평등하게 개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의도대로 개정할 수 없다가, 한국을 강점한 다음 해에 비로소 일본은 불평등조약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화친조약의 다음 단계로 교역을 다루는 미·일수호통상 조약은 일본 측이 버티는 가운데 1858년에야 겨우 타결이 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서도 치외법권, 협정관세율 등 불평등조항은 예외 없이 채택되었다.
<출처 : 일본인의 선택>
1853년 6월 3일, 요코하마 근처의 우라가 앞바다에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동인도함대가 나타났다. 페리가 이끈 4척의 군함 중 2척은 2400톤이 넘는 증기선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최신예 군함이었는데, 이러한 군함의 위세에 눌려 에도 막부는 페리가 가지고 온 미국의 국서를 접수하였으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미·일화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출처 : 일본인의 선택>
미·일화친 조약 및 미·일수호통상 조약
일본이 맺은 미·일화친 조약은 최혜국 대우조항이 삽입된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이 조약을 평등하게 개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의도대로 개정할 수 없다가, 한국을 강점한 다음 해에 비로소 일본은 불평등조약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화친조약의 다음 단계로 교역을 다루는 미·일수호통상 조약은 일본 측이 버티는 가운데 1858년에야 겨우 타결이 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에서도 치외법권, 협정관세율 등 불평등조항은 예외 없이 채택되었다.
<출처 : 일본인의 선택>
1. 서양 세력과 동아시아의 개항
4. 조선의 개항
- 배경
- 이양선 출몰, 병인양요(1866) 및 신미양요(1871) →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 대원군 실각 후 일부 개화론자의 통상 주장 대두
- 운요호 사건 → 강화도 조약 체결(1876)
- 결과
- 문호 개방, 세계사의 흐름에 합류
<출처: 100년 전의 한국사>
운요호 사건
조선 해역에 불법으로 들어와 무력 시위를 한 운요호 사건은 조선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일본측의 계산된 도발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군함외교에 의해 문호를 개방했던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역으로 이용하여,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 처리와 수교 교섭을 위해 4명의 전권 사절단을 조선에 보냈고, 이들 일본 대표단은 인천,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군함을 앞세우고 무력으로 위협을 했다. 일본 대표가 군함을 앞세워 경기도 연안에서 시위를 계속하자, 조선의 접견 대신으로 신헌이 임명되어 일본의 대표를 만나 회담이 진행되는데, 이 회담에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의 해결책으로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출처: 100년 전의 한국사>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일본은 조선이 국제법에 무지한 것을 이용해 조선에게 불리한 불평등한 내용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은 국제법상의 관례를 무시하고 조약의 유효 기간과 폐기 조항을 일부러 빼 불평등한 조약 내용을 무기한 존속시키려고 했다.
<출처: 100년 전의 한국사>
조선 해역에 불법으로 들어와 무력 시위를 한 운요호 사건은 조선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일본측의 계산된 도발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군함외교에 의해 문호를 개방했던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역으로 이용하여,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 정부는 운요호 사건 처리와 수교 교섭을 위해 4명의 전권 사절단을 조선에 보냈고, 이들 일본 대표단은 인천,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군함을 앞세우고 무력으로 위협을 했다. 일본 대표가 군함을 앞세워 경기도 연안에서 시위를 계속하자, 조선의 접견 대신으로 신헌이 임명되어 일본의 대표를 만나 회담이 진행되는데, 이 회담에서 일본은 운요호 사건의 해결책으로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출처: 100년 전의 한국사>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일본은 조선이 국제법에 무지한 것을 이용해 조선에게 불리한 불평등한 내용의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은 국제법상의 관례를 무시하고 조약의 유효 기간과 폐기 조항을 일부러 빼 불평등한 조약 내용을 무기한 존속시키려고 했다.
<출처: 100년 전의 한국사>
각주 283)
운요호 사건
주 284운요호운요호
각주 284)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1876)
제1조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두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인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통상을 할 수 있게 한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는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할 수 있게 한다.
제10조 일본국 인민이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가 되더라도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강화도 조약강화도 조약
제1조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두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인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통상을 할 수 있게 한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는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할 수 있게 한다.
제10조 일본국 인민이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가 되더라도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강화도 조약강화도 조약
1.서양 세력의 등장과 동아시아의 개항
청의 개항
일본의 개항
조선의 개항
-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난징조약(1842)을 체결하여 서양에 문호 개방
- 미국의 무력 시위에 굴복하여 미·일화친조약(1854) 및 미·일수호조약(1858) 을 체결하여 서양에 문호 개방
- 일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면서 문호 개방
- 각주 279)
- 각주 280)
- 각주 281)
- 각주 282)
- 각주 283)
-
각주 284)
강화도 조약강화도 조약(1876)
제1조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두 항구를 개방하고 일본인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통상을 할 수 있게 한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는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할 수 있게 한다.
제10조 일본국 인민이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가 되더라도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강화도 조약강화도 조약
색인어
- 지명
-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가나가와, 나가사키, 니가타, 효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