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Ⅳ. 5호16국·남북조 상쟁기 이주민과 고구려·백제
앞 장에서는 낙랑·현토 등 한 군현이 설치·유지되었던 시기를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 제1기로 간주하고, 군현민과 고구려 초기의 국가적 발전과의 연관성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두 번째 단계로서 304년부터 6세기 후반에 이르는 시기를 살펴보고자 한다.주 055
이 시기 중국에서는 8왕(八王)의 난(亂) 이래 동진(東晋)을 거쳐 유송(劉宋)초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발생하였다. 수십만 내지 백만으로 추산되는 이들의 이주는 거의 집단적인 것으로 북중국의 전란과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주 056그리고 대량의 이주를 촉발했던 북중국의 혼란은 북위(北魏)의 화북(華北) 통일, 다시 동(東)·서위(西魏)의 분열을 거쳐 北周의 재통일로 일단락된다.
한편 요하 이서(以西)지역에는 고구려·백제(百濟)·신라(新羅)의 3국이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이루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율령의 반포와 불교 수용 등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특히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는 이들 국가가 화북지역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제왕조(諸王朝)들과 책봉·조공관계를 맺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는 고구려 등 삼국의 국가적 발전사 뿐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도 제2의 획기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현상은 이 시기 많은 중국인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화북지역의 동란으로 이들 중국계 이주민의 유입이 있었고, 이와 짝하여 고구려는 국가적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 시기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유입된 중국계 이주민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에 따르면 5호16국시대가 열리던 무렵부터 중국계 이주민이 나타난다.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의 예가 여기에 해당한다. 서진(西晉) 말(末)의 혼란은 요하일대에서 선비 모용씨(慕容氏)의 성장을 가져왔고, 모용씨 세력은 모용외(慕容廆)의 사후 그 아들 간의 권력투쟁을 거쳐 전연(前燕)을 세워 요하일대와 하북성(河北省)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동수(冬壽)·곽충(郭充)과 봉추(封抽)·송황(宋晃)·유홍(游泓) 등이 고구려로 이주하였다. 한편 전연은 부견(苻堅)의 전진(前秦)에게 패망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385년 이전의 일로 추정되는 유주(幽州)·기주(冀州) 유민의 경우도 전진의 쇠망과 후연(後燕)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서 고구려로 유입되었다고 보인다. 또한 풍비(馮丕)와 풍홍(馮弘) 등은 후연을 계승한 북연인(北燕人)으로 특히 국왕이던 풍홍이 수도 화룡성민(和龍城民)을 이끌고 고구려로 들어왔다는 점에서 주목이 간다. 그러던 북중국의 혼란을 수습한 국가는 북위였다. 한상(韓詳)과 강과(江果) 등은 6진(鎭)의 난으로 일어난 북위 말의 혼란과 관계된 이들이다. 끝으로 보번(步蕃)은 북위의 분열에 따른 동·서위의 대결과정에서 유입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순도(順道)의 경우는 후술).
중국계 이주민이 고구려에 유입된 경위를 살펴본 결과, 이들의 이주는 예외 없이 북중국 지역의 정치적 혼란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위로는 서진 말의 혼란으로부터 동위와 서위의 대결기까지 변화의 국면이 나타날 때마다 이주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북중국의 정치·군사적 혼란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혼란의 여파가 이주민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국에서의 지위로 보면 이주민에는 왕국의 국왕(풍홍)으로부터 고관(모용평)·지방관(최비, 강과)과 그 속료(동수·송황 등), 그리고 지역 호족(豪族, 한상 등)과 일반민까지 거의 모든 계층이 포괄되어 있음을 본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살피게 될 일본열도로의 이주민 즉 ‘도래인’이 주로 학식·기술 등을 소지한 기능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과 비교된다.
이처럼 지속적인 유입의 흐름을 보인 중국계 이주민들은 고구려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을까. 또한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는 어떤 기여를 하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이들 이주민이 어떤 자격으로 고구려에 입국하였는가부터 살펴보자. 적지 않은 경우가 고국을 등지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 ‘망명(亡命)’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 유의된다. 자신의 세력기반을 모두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던 최비의 경우는 동수와 봉추에게서 그대로 보이며, 모용평과 북연왕 풍홍의 사례도 크게 보아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사례인 보번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중국계 주민이 요하를 건너왔다고 해서 그대로 고구려에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모용평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 망명자의 운명은 고구려가 영내 진입을 허용하는가에 따라 좌우되었다. 심지어는 고구려에 거주케 되었더라도 갑작스럽게 떠나온 곳으로 돌려보내지는 경우도 있었다. 338년 고구려에 입국했던 송황이 349년에는 전연으로 송환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계 이주민의 고구려 입국은 고구려가 이들을 수용할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었으며, 정착 이후의 생활도 고구려의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중국계 망명인이 아무런 연고가 없던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이들을 그곳에 안치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모용평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중국계 이주민을 적극 수용하였다고 보인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가서까지 영입해오기도 하였다. 바로 북연왕 풍홍과 한상·강과의 경우가 이를 보여준다. 북연왕이 고구려를 피신처로 택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대북위외교(對北魏外交)를 통해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구려는 북위군과의 충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입을 위해 군대를 요하 너머의 화룡성까지 보내었다.주 070한상과 강과의 영입도 고구려군이 이전의 화룡성, 당시의 영주(營州)까지 진출했던 결과였다.주 071
고구려는 어째서 중국계 이주민을 필요로 하였던 것일까. 북연왕 풍홍의 경우를 좀더 보자. 고구려가 북연왕을 영입하였던 것은 동진해 오고 있던 북위의 세력확대와 관련이 있었다. 5호16국의 혼란은 북위가 화북 전역을 평정함으로써 수습되어갔다. 북연의 멸망은 그 와중에 벌어진 일로 북위의 세력확대가 고구려로 밀려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북연왕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북위의 세력확대를 견제하는 억제력으로 삼고자 하였다.주 072영입한 북연왕을 평곽(平郭)에 안치했다는 점이 이를 말하여 준다.주 073평곽은 요하에 가까운 곳으로 요서(遼西)를 겨냥할 수 있는 거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주 074
한편 이러한 북연왕에 대해 남쪽의 송(宋)이 영입하겠다고 나선 것은 송을 중심으로 일련의 국가들이 북위에 대항하고 있던 당시의 국제관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송은 그를 구실로 삼아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의도였다. 북위의 위협을 덜어내기 위해 고구려를 제2의 전선(戰線)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주 075이 점에서 고구려가 풍홍 일가를 제거한 것은 송과의 연결 가능성을 부정하고 북위에 유화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고구려는 북위에 적대하기 보다는 송의 북연왕 영입 시도를 역으로 활용하여 양국의 불안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즉 북연왕 풍홍의 향배를 둘러싸고 일어난 고구려와 북위, 송 간의 관계 악화와 충돌은 즉 북위의 위협으로부터 북위와 송의 대결관계로 이어지던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대외적 위기 속에서 북연왕 풍홍을 매개로 한 고구려의 대외전략이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대북위 관계의 악화와 충돌 위기 속에서도 북위와 대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 고구려의 대북위 관계가 군사적 충돌이라는 극단적 적대관계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것은 다른 국가들의 예와 비교하여 보면 자명하게 드러난다. 송을 비롯하여 유연(柔然)·하(夏)·북연(北燕)·북량(北涼)·무도(武都)·토곡혼(吐谷渾)등 거의 국가들은 북위의 침공을 받아 커다란 피해를 입고 심지어는 패망하기조차 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빠져나오지 못했던 남북조의 대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중국 방면의 안정이 고구려가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전략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바로 여기에 북연왕 등의 중국계 이주민이 기여한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주 076
한편 중국계 이주민의 유입은 한 시기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중국 방면의 정세변화가 나타날 때마다 나타나곤 하였다. 유입된 이주민의 면면도 제각각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계 이주민의 역할도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한정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동수의 사례가 이를 말하여 준다. 동수의 무덤이 소재하고 있는 황해도 안악(安岳)은 본래 낙랑과 대방군이 있던 지역이다. 즉 동수는 군현 고지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낙랑·대방군 지역을 차지한 것은 313년 무렵의 일이지만 지역 지배가 순조롭지는 못하였다. 아래의 기사가 이를 말하여준다.
이러한 낙랑·대방고지에 대해 고구려는 동수와 같은 중국계 이주민을 안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주 079또한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명문전(銘文塼)들은 과거 군현의 지배세력의 세력기반이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주 080고구려의 지배방식이 회유와 무마를 위주로 한 것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즉 동수 등은 고구려의 낙랑·대방고지 경영과 관련하여 고구려와 군현민 간의 새로운 관계 구축에서 매개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주 081
고구려는 고국원왕대(故國原王代)부터 평양성(平壤城)을 전진기지로 삼아 남진에 힘을 기울였고, 427년에 가서는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고구려가 평양 등 과거 군현지역의 경영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동수·■진 등의 중국계 이주민은 고구려가 군현고지를 경영해 가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제2기에 모습을 보이는 중국계 이주민은 고구려가 당면해 있던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동원되었다. 대외적 위기에서 교섭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으며 평양 지역의 경영을 맡았다는 것이 이를 말하여 준다. 고구려인이 감당하기에는 곤란한 문제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사로 보아서 4~6세기의 시기는 전연에게 왕도(王都)를 함락당하고 백제와의 전쟁에서 국왕이 전사했던 고국원왕대의 좌절을 딛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전성기를 이룩했던 시간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소수림왕대(小獸林王代)에 태학(太學)이 세워지고 율령이 반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짝하였던 불교 수용이 순도의 입국을 계기로 하였던 것처럼 고구려의 태학과 율령에도 중국계 이주민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일 그러하다면 중국계 이주민은 고구려의 국가적 발전과 관련하여 대내외의 다방면에서 활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계 이주민의 역할이 있었다고 해도 이러한 국가체제의 정비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군현민에 의해 일정한 토대가 닦여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율령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법체계를 만들어 시행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발전해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는 장기간에 걸쳐 군현 지역을 접수해오고 있었다. 중국의 율령 지배를 장기간 경험한 군현민을 지속적으로 확보해 왔던 것이다.주 082
순도가 입국한 지 3년이 되던 해, 고구려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다.주 083이로 보아 고구려는 신라의 이차돈(異次頓) 순교(殉敎)와 같은 수용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오래 전부터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을 군현민을 통해 국가불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귀족 자제를 교육하여 관리를 양성했던 태학 역시 고구려 사회의 한자문화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려주는데, 여기에도 군현민의 관여를 상정하여 볼 수 있다.
나아가 제2기에는 이주민의 흐름이 요하를 건너 한반도에까지 이르고 있던 시기였다. 이 점에서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주민의 역할이 상당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그것은 고구려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좌우되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이로 보아 적어도 고구려가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발전해 가는데 중국계 이주민의 역할은 군현 설치이래 끊임없이 고구려에 흡수되어온 군현민을 넘어서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 한가운데에 고구려의 주체적인 전략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8왕(八王)의 난(亂) 이래 동진(東晋)을 거쳐 유송(劉宋)초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발생하였다. 수십만 내지 백만으로 추산되는 이들의 이주는 거의 집단적인 것으로 북중국의 전란과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주 056그리고 대량의 이주를 촉발했던 북중국의 혼란은 북위(北魏)의 화북(華北) 통일, 다시 동(東)·서위(西魏)의 분열을 거쳐 北周의 재통일로 일단락된다.
한편 요하 이서(以西)지역에는 고구려·백제(百濟)·신라(新羅)의 3국이 고대국가로의 발전을 이루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율령의 반포와 불교 수용 등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특히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는 이들 국가가 화북지역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제왕조(諸王朝)들과 책봉·조공관계를 맺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는 고구려 등 삼국의 국가적 발전사 뿐 아니라 이들을 포함한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도 제2의 획기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이 가는 현상은 이 시기 많은 중국인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화북지역의 동란으로 이들 중국계 이주민의 유입이 있었고, 이와 짝하여 고구려는 국가적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 시기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유입된 중국계 이주민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4~6세기 중국으로부터 고구려에 유입된 중국계 이주민
중국계 이주민이 고구려에 유입된 경위를 살펴본 결과, 이들의 이주는 예외 없이 북중국 지역의 정치적 혼란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위로는 서진 말의 혼란으로부터 동위와 서위의 대결기까지 변화의 국면이 나타날 때마다 이주민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북중국의 정치·군사적 혼란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혼란의 여파가 이주민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국에서의 지위로 보면 이주민에는 왕국의 국왕(풍홍)으로부터 고관(모용평)·지방관(최비, 강과)과 그 속료(동수·송황 등), 그리고 지역 호족(豪族, 한상 등)과 일반민까지 거의 모든 계층이 포괄되어 있음을 본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살피게 될 일본열도로의 이주민 즉 ‘도래인’이 주로 학식·기술 등을 소지한 기능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과 비교된다.
이처럼 지속적인 유입의 흐름을 보인 중국계 이주민들은 고구려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을까. 또한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는 어떤 기여를 하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이들 이주민이 어떤 자격으로 고구려에 입국하였는가부터 살펴보자. 적지 않은 경우가 고국을 등지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 ‘망명(亡命)’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 유의된다. 자신의 세력기반을 모두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던 최비의 경우는 동수와 봉추에게서 그대로 보이며, 모용평과 북연왕 풍홍의 사례도 크게 보아서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사례인 보번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중국계 주민이 요하를 건너왔다고 해서 그대로 고구려에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모용평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 망명자의 운명은 고구려가 영내 진입을 허용하는가에 따라 좌우되었다. 심지어는 고구려에 거주케 되었더라도 갑작스럽게 떠나온 곳으로 돌려보내지는 경우도 있었다. 338년 고구려에 입국했던 송황이 349년에는 전연으로 송환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계 이주민의 고구려 입국은 고구려가 이들을 수용할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었으며, 정착 이후의 생활도 고구려의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중국계 망명인이 아무런 연고가 없던 지역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이들을 그곳에 안치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모용평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중국계 이주민을 적극 수용하였다고 보인다. 심지어 국경을 넘어가서까지 영입해오기도 하였다. 바로 북연왕 풍홍과 한상·강과의 경우가 이를 보여준다. 북연왕이 고구려를 피신처로 택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대북위외교(對北魏外交)를 통해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구려는 북위군과의 충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입을 위해 군대를 요하 너머의 화룡성까지 보내었다.주 070한상과 강과의 영입도 고구려군이 이전의 화룡성, 당시의 영주(營州)까지 진출했던 결과였다.주 071
고구려는 어째서 중국계 이주민을 필요로 하였던 것일까. 북연왕 풍홍의 경우를 좀더 보자. 고구려가 북연왕을 영입하였던 것은 동진해 오고 있던 북위의 세력확대와 관련이 있었다. 5호16국의 혼란은 북위가 화북 전역을 평정함으로써 수습되어갔다. 북연의 멸망은 그 와중에 벌어진 일로 북위의 세력확대가 고구려로 밀려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북연왕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북위의 세력확대를 견제하는 억제력으로 삼고자 하였다.주 072영입한 북연왕을 평곽(平郭)에 안치했다는 점이 이를 말하여 준다.주 073평곽은 요하에 가까운 곳으로 요서(遼西)를 겨냥할 수 있는 거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러하다.주 074
한편 이러한 북연왕에 대해 남쪽의 송(宋)이 영입하겠다고 나선 것은 송을 중심으로 일련의 국가들이 북위에 대항하고 있던 당시의 국제관계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송은 그를 구실로 삼아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의도였다. 북위의 위협을 덜어내기 위해 고구려를 제2의 전선(戰線)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주 075이 점에서 고구려가 풍홍 일가를 제거한 것은 송과의 연결 가능성을 부정하고 북위에 유화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고구려는 북위에 적대하기 보다는 송의 북연왕 영입 시도를 역으로 활용하여 양국의 불안한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즉 북연왕 풍홍의 향배를 둘러싸고 일어난 고구려와 북위, 송 간의 관계 악화와 충돌은 즉 북위의 위협으로부터 북위와 송의 대결관계로 이어지던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대외적 위기 속에서 북연왕 풍홍을 매개로 한 고구려의 대외전략이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 고구려는 대북위 관계의 악화와 충돌 위기 속에서도 북위와 대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면 고구려의 대북위 관계가 군사적 충돌이라는 극단적 적대관계까지 나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것은 다른 국가들의 예와 비교하여 보면 자명하게 드러난다. 송을 비롯하여 유연(柔然)·하(夏)·북연(北燕)·북량(北涼)·무도(武都)·토곡혼(吐谷渾)등 거의 국가들은 북위의 침공을 받아 커다란 피해를 입고 심지어는 패망하기조차 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빠져나오지 못했던 남북조의 대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중국 방면의 안정이 고구려가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전략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바로 여기에 북연왕 등의 중국계 이주민이 기여한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주 076
한편 중국계 이주민의 유입은 한 시기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중국 방면의 정세변화가 나타날 때마다 나타나곤 하였다. 유입된 이주민의 면면도 제각각이었다. 이 점에서 중국계 이주민의 역할도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한정되었을 리는 만무하다. 동수의 사례가 이를 말하여 준다. 동수의 무덤이 소재하고 있는 황해도 안악(安岳)은 본래 낙랑과 대방군이 있던 지역이다. 즉 동수는 군현 고지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낙랑·대방군 지역을 차지한 것은 313년 무렵의 일이지만 지역 지배가 순조롭지는 못하였다. 아래의 기사가 이를 말하여준다.
고구려가 애써 획득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군현민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남쪽의 백제와 대결하는데에도 이들의 지지와 협력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군현민은 고구려의 지배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저항적 자세를 보였다.주 078왕준 등은 근거지를 떠나 중국으로의 이주를 택할 정도로 고구려의 지배에 반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낙랑·대방고지에 대해 고구려는 동수와 같은 중국계 이주민을 안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주 079또한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명문전(銘文塼)들은 과거 군현의 지배세력의 세력기반이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주 080고구려의 지배방식이 회유와 무마를 위주로 한 것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즉 동수 등은 고구려의 낙랑·대방고지 경영과 관련하여 고구려와 군현민 간의 새로운 관계 구축에서 매개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주 081
고구려는 고국원왕대(故國原王代)부터 평양성(平壤城)을 전진기지로 삼아 남진에 힘을 기울였고, 427년에 가서는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고구려가 평양 등 과거 군현지역의 경영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동수·■진 등의 중국계 이주민은 고구려가 군현고지를 경영해 가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제2기에 모습을 보이는 중국계 이주민은 고구려가 당면해 있던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동원되었다. 대외적 위기에서 교섭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으며 평양 지역의 경영을 맡았다는 것이 이를 말하여 준다. 고구려인이 감당하기에는 곤란한 문제들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사로 보아서 4~6세기의 시기는 전연에게 왕도(王都)를 함락당하고 백제와의 전쟁에서 국왕이 전사했던 고국원왕대의 좌절을 딛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전성기를 이룩했던 시간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소수림왕대(小獸林王代)에 태학(太學)이 세워지고 율령이 반포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과 짝하였던 불교 수용이 순도의 입국을 계기로 하였던 것처럼 고구려의 태학과 율령에도 중국계 이주민이 관여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만일 그러하다면 중국계 이주민은 고구려의 국가적 발전과 관련하여 대내외의 다방면에서 활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국계 이주민의 역할이 있었다고 해도 이러한 국가체제의 정비가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군현민에 의해 일정한 토대가 닦여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율령이 마련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법체계를 만들어 시행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발전해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는 장기간에 걸쳐 군현 지역을 접수해오고 있었다. 중국의 율령 지배를 장기간 경험한 군현민을 지속적으로 확보해 왔던 것이다.주 082
각주 082)
이러한 관계를 좀 더 확실하게 엿볼 수 있는 것이 불교 수용(受容)과 태학 건립이다.백제의 경우에도 군현민의 계통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이 여럿 보인다. 개로왕과 동성왕대 중국에 보낸 국서에 등장하는 장무(張茂)·고달(高達)·양무(楊茂)·왕무(王茂)·장새(張塞)·진명(陳明) 등과 왜에 문물을 전했다는 백제인 고흥(高興)·왕인(王仁) 등은 낙랑·대방군의 축출과정에서 흡수된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權五榮(1995), 「백제의 성립과 발전」 『한국사』 6, 22쪽). 또한 4세기 무렵 백제의 국가적 발전 역시 군현을 통해 유입된 인적 자원의 기여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李成市(1992), 앞의 글, 385쪽).
순도가 입국한 지 3년이 되던 해, 고구려는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阿道)를 머물게 하였다.주 083이로 보아 고구려는 신라의 이차돈(異次頓) 순교(殉敎)와 같은 수용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오래 전부터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을 군현민을 통해 국가불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귀족 자제를 교육하여 관리를 양성했던 태학 역시 고구려 사회의 한자문화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려주는데, 여기에도 군현민의 관여를 상정하여 볼 수 있다.
나아가 제2기에는 이주민의 흐름이 요하를 건너 한반도에까지 이르고 있던 시기였다. 이 점에서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형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주민의 역할이 상당하였을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그것은 고구려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좌우되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이로 보아 적어도 고구려가 고대 동아시아세계의 일원으로 자리하고 발전해 가는데 중국계 이주민의 역할은 군현 설치이래 끊임없이 고구려에 흡수되어온 군현민을 넘어서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 한가운데에 고구려의 주체적인 전략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싶다.
- 각주 055)
- 각주 056)
- 각주 057)
- 각주 058)
- 각주 059)
- 각주 060)
- 각주 061)
- 각주 062)
- 각주 063)
- 각주 064)
- 각주 065)
- 각주 066)
- 각주 067)
- 각주 068)
- 각주 069)
- 각주 070)
- 각주 071)
- 각주 072)
- 각주 073)
- 각주 074)
- 각주 075)
- 각주 076)
- 각주 077)
- 각주 078)
- 각주 079)
- 각주 080)
- 각주 081)
- 각주 082)
- 각주 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