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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적인 문화를 지향하다. 수산리 고분벽화 1971년 북한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 한 기에 학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수산리 벽화고분이 그것이다. 고분은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는 벽화들을 통해 고구려 시대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산리 벽화고분이 축조되었던 5세기, 고구려는 명실상부한 동북아의 중심 국가였다. 고구려가 그렇게 중심 국가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잘 알려진 대로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군사력 하나만으로 오랜 세월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제 수산리 고분벽화의 원형을 토대로 복원된 모습을 통해 고구려가 동북아의 중심으로 설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를 만나보자.

개방적인 문화를 지향하다. 수산리 고분벽화 수산리 고분은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에서 서남쪽으로 4km 떨어진 고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분은 생활풍속도를 그린 흙무지돌방벽화무덤으로 그 내부는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명의 문지기 장수가 지키는 널길을 지나 널방에 이르면 동서남북 네 벽에서 무덤 주인의 생활이 담긴 벽화를 만날 수 있다. . 벽화를 남긴 고구려인들은 연꽃을 비롯해 화려한 문양으로 네 벽을 장식했고 기둥과 두공, 들보를 그려 넣어 무덤의 내부를 마치 목조 건물처럼 보이도록 했다.
널길 무덤에 들어서면 먼저 오른손에 둥근고리 큰 칼을, 왼손에는 깃발을 단 긴 창을 든 장수가 지키고 서 있다. 고구려인들은 창과 칼로 무장한 문지기를 배치하여 무덤이 오랫동안 지켜지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북벽 무덤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심하게 훼손된 북벽과 마주치게 된다. 전체 벽면의 화면구성은 무덤 주인부부의 실내생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원래 북벽에는 건물 한가운데 놓여진 평상 위로 서쪽에 붉은 색 옷을 입은 묘주인이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있고, 여주인은 동쪽에 앉아 남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며, 묘 주인 옆에는 부채를 든 남자 시종 3명이 서 있었다. 현재는 주인공 부부와 남자 시종 3명의 그림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화면 오른편의 시녀들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긴 저고리와 주름치마를 입고 얹은 머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쓴 남자 시종들이 주인의 명을 기다리듯, 정중한 자세로 서있다.
북벽의 인물들 중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바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 역사상이다. 서벽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 역사는 벽화의 훼손으로 얼굴이나 몸체가 선명하지 않아 그 모습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른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역사상들의 이국적인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에서 대체로 서역계통의 인물로 볼 수 있다. 고구려와 멀리 떨어진 서역 사람이 어떻게 이 무덤에까지 등장하게 됐을까? 이는 당시 고구려 문화가 멀리 서역과 폭넓게 교류할 만큼 개방적이고 국제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동벽 동벽에는 마름모꼴이 반복되는 2줄의 긴 띠로 단을 나누고 위에는 서로 마주 향한 두 사람의 모습을, 아래에는 북과 뿔나팔을 연주하며 행진하는 고취악대의 모습을 그렸다. 화면 상단에는 한 사람은 선 채로, 또 한 사람은 앉은 채로,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묘사되었는데 아마도 묘주로 추정되는 인물을 영접하는 장면이 아닌가 여겨진다. 재미있는 점은 두 인물의 크기가 서로 달라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의 비율이 훨씬 작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 시대에 신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다르게 그렸기 때문이다. 하단에는 행렬의 선두에 서서 멜북을 치는 사람들과 그 뒤로 뿔나팔을 불며 따라가는 사람이 보인다. 멜북은 어깨에 메는 북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다른 고구려 벽화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오늘날의 북의 형태와 달라 이채롭다.
남벽 널방의 입구 남벽에는 황색 옷을 입고 햇빛을 가리도록 일산을 쓴 남자들이 마치 묘주를 맞이하듯 무덤 입구의 양편에 서 있다. 인물들 주변에는 화려한 구름 문양이 보인다. 이러한 구름무늬는 무덤 내부 곳곳에 장식되어 있는데, 무덤의 내부가 현실 속의 공간이 아닌 상서로운 기운을 지닌 내세의 환상적인 세계임을 알려준다.
서벽 이제 수산리 벽화에서 고구려 생활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서벽을 살펴보자. 서벽은 마름모꼴을 반복해서 그린 2줄의 긴 띠로 벽면을 위 아래로 나누고,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부부 일행이 곡예를 구경하는 나들이 행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무덤 주인은 깃, 앞 중심, 밑단, 소매부리 등의 의복 가장자리에 검은색 선을 두른 요즘의 두루마기와 같은 포를 입고 머리에는 검은 관을 써서 위엄을 갖추었고, 여주인은 붉은 연지로 모양을 낸 화장과 고급 비단에 자수를 곁들인 저고리와 같은 유를 입고, 색색의 천을 이어 붙인 색동치마를 입어 고구려 귀족 여인의 화려하고 세련된 복식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시종과 시녀가 받쳐주는 일산을 쓴 무덤의 주인부부 뒤로 화려한 옷을 입은 남자와 여인들이 따르고 있다. 귀족들과 달리 시녀의 차림은 다소 소박한 편이다. 이처럼 고구려시대엔 신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차림과 꾸밈새가 달랐다. 행렬의 앞에는 곡예사들이 서로 재주를 다투듯이 다양한 기예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 기예는 서역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에서 살펴본 이국적 풍모의 역사상과 함께 이는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나라와도 교류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풍요롭게 가꿔왔음을 말해준다. 또한 안악3호분, 덕흥리 고분에 보이는 복식과 달리 수산리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세련된 옷차림과 꾸밈새는 고구려 상류 사회의 특징을 뚜렷이 내 보이고 있어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수준 높은 문화 생활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수산리 고분은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어 2004년 고구려 시대의 다른 고분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일본 나라현에 위치한 다카마쓰 고분. 이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여인도 색동주름치마를 입고 있는데, 수산리 고분 벽화의 여주인의 옷차림과 매우 흡사하다. 이는 고구려의 문화가 주변 국가에 끼친 영향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문헌기록과 달리 고구려 당시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전해준다. 벽화를 통해 고구려가 군사력만이 아니라 높은 문화 수준으로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자리잡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복원된 수산리 고분 벽화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