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를 도쿠가와 막부 또는 수도인 에도(오늘날의 도쿄)의 이름을 따 에도 막부라고 합니다. 막부란 무사들이 차지한 정권을 말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임진왜란으로 틀어진 조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사절단
국가나 정부를 대표하여 일정한 임무를 띠고 외국에 파견되는 사람들
을 다시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은 대규모의 문화 사절단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믿음을 나눈다’라는 의미에서 ‘통신사(通信使)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고도 한다. 조선이 1403년(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그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 장군도 책봉을 받자, 중국·조선·일본 간에는 사대·교린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처지의 교린 국가가 되고, 조선 국왕과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으로 칭함)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신사란 용어는 대등한 국가간에 신의(信義)를 통(通)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의 사절 왕래가 많아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에 달하였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의 호칭을 갖지는 않았으며, 이 중 장군에게 간 것은 8회 뿐이다. 예를 들면 명칭도 회례사·회례관·보빙사·경차관·통신사·통신관 등 일정치 않았고, 목적과 편성도 다양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조건과 목적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국왕)에게 파견된다. 둘째, 일본 국왕의 길흉 또는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을 갖는다. 셋째,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국서와 예단을 지참한다. 넷째, 사절단은 중앙의 고위관리인 삼사 이하로 편성한다. 다섯째, 국왕사의 칭호도 갖는다.
〈출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라고 하였습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의 약 200여 년간 12번에 걸쳐 일본에 보내졌습니다.